본문 바로가기
영화

영화 [완득이] 속 '주먹'과 '춤'의 성장 (완득이, 2011)

by joue 2023. 9. 17.
반응형

서론

 춤으로 시작해서 다시 춤으로 끝나는 영화, <완득이>는 주먹 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완득이>에는 영화의 큰 축을 이루는 커다란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완득이의 성장 서사를 중심으로 완득이와 그 주변 인물들의 입체적인 모습, 크고 작은 갈등과 고민들이 엮여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익숙하게 그려진 영화 속 인물들의 소수자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영화가 조명을 비추는 인물들은 장애인,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저소득층, 비주류스포츠 종사자, 무협지 여성작가 등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완득이를 비롯한 인물들이 차별 받는 모습만을 비추지는 않는다. 그들 삶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비추며 주먹을 쥐고, 주먹 쥔 손을 휘두르기도 하는, 행복한 척을 하며, 혹은 정말 행복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 작은 움직임들을 담으며, 관객들에게 익숙한 형태로 자연스럽게 이 사회의 문제를 전달한다. <완득이>에 나타난 주먹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화의 감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주먹 어쩔 수 없어요, 이기기 위해서는 

 영화 초반, 시장에서 텃세를 부리는 상인들에게 수난을 겪고 있는 아버지를 본 <완득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른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완득이에게 내가 주먹질하지 말라고 했지라 말한다. 완득이에게 주먹은, 이 사회에서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이웃집 아저씨가 아버지와 민구 삼촌을 병신이라 욕할 때에도 완득이는 망설임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완득이가 주먹을 쓰는 장면은 핸드 헬드로 생동감 있게 그려지기도 하고, 슬로우 모션으로 과장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이렇게 생생하게 강조된 완득이의 주먹수업시간,밀레의 그림에 대한 득이 대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완득이는 그림 속 이삭 줍는 여인들을 가난한 집안에서 시집온 이방인이라 말한다. 이 대사를 듣자마자 관객들은 그의 필리핀 출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그림과 완득이의 얼굴을 교차 편집하며 이어지는 다음 대목에서 완득이는 그림 속 여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주먹을 쥐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농장 주인과 한 판 붙기 위해, 왼손에 쥔 지푸라기로 상대의 시야를 가리고, 주먹 안에 돌이를 쥐고있다 말하며 어쩔 수 없어요. 이기기 위해서는이라 덧붙인다.자기들 나라에서는 다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 한국 사회에서 차별 받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대목이다. 이 이삭 줍는 여인들이 쥔 주먹은 완득이가, 완득이 엄마가, 아버지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차별 받는 모든 소수자들이 어쩔 수 없이 이기기 위해주먹일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듯 하다.  

 완득이를 계속해서 자매님이라 부르는 핫산에 의해 가게 된 킥복싱 도장에서, 완득이는 처음으로 이 주먹을 글러브 속에 넣는다. 맨 주먹으로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닌, 처음으로 스포츠의 규칙과 보호 장비 안에 들어가 주먹을 휘두르게 된다. 킥복싱을 하기로 마음먹은 완득이는 이제 러닝을 하며, 사람이 아닌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이 주먹 완득이의 성장은 다른 체육관 선수와 스파링을 하며 절정에 이른다. 

 경기 초반, 링 밖에서 거리를 두고 링 안을 비추는 카메라는 완득이와 상대 선수의 초반 신경전 뿐만 아니라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완득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점차 라운드가 진행되고, 완득이의 가빠지는 호흡과 함께 링 위로 올라간 카메라는 직접 상대편 선수의 펀치에 맞는 듯한 연출을 하기도 하고, 슬로우 모션으로 완득이가 쓰러지는 장면을 비추며 완득이의 인생 서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하이앵글로 비추는 카메라에 담긴 쓰러진 완득이는 카메라를 마주하며 크게 웃는다. 이 웃음의 이유가 지난 날 어머니에게 신발을 신겨주며 가까워졌던 거리 때문일지, 고대하던 링 위에서 스파링을 했기 때문인지, 혹은 그냥 별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제발 똥주 좀 죽여달라며기도하던 완득이는 후반부의 절정에 이르며 성장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똥주, 윤하, 그리고 세상 가까워완득이는 이제 어쩔 수 없이 휘두르던 주먹이 아닌 다른 주먹을 휘두르게 된 것이 기뻐서 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 “난 사람들하고 유일하게 어울릴 수 있는 게 춤 밖에 없었어 

 이 영화는 카바레에서 춤을 추는 완득이의 아버지를 비추며 시작한다. 카바레 구석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완득이의 시선에서 로우앵글로 비춰지는 아버지의 춤은 신명나는 음악과 우스꽝스러운 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바레가 세상의 전부였다고 말하는 완득이의 내레이션과 더해지며 완득이가 느끼는 아버지의 무게감을 확대해 보여준다. 

 완득이의 세상의 전부 담았던 춤은 마사지용 채칼이라는 은유적 사물과 결합하며 그 지위 격하된다. 완득이의 아버지와 민구삼촌은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굽신거리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카바레에서 웃고 있는 광대 분장을 하며 춤을 추던 것과는 달리, 영월 시장에서 춤을 추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눈물과 내려간 입꼬리의 분장이 그려져 있다. 이 분장이 은유적으로 상징하듯, 카바레에서도, 시장에서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춤을 추고 있지만 무대에서 으로 즐거움을 주던 것과 춤을 통해 채칼을 파는 것사이에는 아버지에게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춤에 대해, 아버지와 킥복싱으로 말다툼을 하던 완득이는 아버지는 그렇게 하고 싶은 거(=춤) 다 하셨으면서 왜 저는 못하게 하는데요라 말한다. 이에 대해 완득이 아버지는 세상 어디서 나 같은 놈 받아주겠냐,난 사람들과 유일하게 어울릴 수 있는 게 춤 밖에 없었다 말한다. 완득이가 어쩔 수 없이쥐었지만 이제는 웃으며하게 되는 것이 주먹(킥복싱)이었듯,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쥐게 된 것은 춤이었다. 시작은 원해서 였을 수 있겠지만, 이제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된 춤을 추는 자신과는 달리 사지 멀쩡한아들 만큼은, 떳떳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 

 극 후반부에 이르러, 러한 아버지의 다 함께 추는 춤이 되며 아버지 개인의 내면적 갈등 해소되는 것을 넘어서서, 관객들로 하여금 화합의 의미까지 되새기게 한다.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극 중 인물들은 모두 인종과 국적, 나이와 성별, 직업과 관계를 따지지 않고 다 함께 춤을 춘다. 마치 시의 수미상관처럼,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는 을 매개로 이어져 있다. 초반부 완득이 아버지 홀로 추던 춤이 후반부에는 다 함께 추는 춤이 된 것은, 차별과 편견 없이 화합하는 사람들세상을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버지는 똥주가 세운 문화센터에서 민구삼촌과 함께 춤 교습을 하게 된다. 완득이가 어쩔 수 없이 쥐었던 주먹킥복싱이 된 것처럼,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추었던, 하지만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던 문화센터 이론 교습이 되는 모습을 비추며 아버지의 성장 또한 그려낸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한글 교육을 맡게 된 호정누나, 벽화를 그리는 화가(이웃집 아저씨), 그리고 전 재산을 털어 교회를 사서 문화센터를 만든 똥주, 그리고 그 문화센터에 오는 다문화/다국적의 인물들까지. 이 영화는 완득이 뿐만 아니라 완득이를 둘러싼 세상의 성장을 다양한 소재로 그려내며 1시간 30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간다.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고난 받는 소수자들의 삶을 시혜적이지 않은 시각에서 담담하고 유쾌하게 그려냈기에 오히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영화가 담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