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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기생충] - 이차프레임의 구분짓기 (Parasite, 2019)

by joue 2023.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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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영화 <기생충>은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택 가족의 ‘창문’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창문이 비추는 바깥의 모습은 서로 다른 계급의 가족들의 삶의 현실을 보여주고, 창문 안쪽 인물들의 욕망을 비춘다. 또한 그 창문(유리벽) 사이로 지나는 ‘선’은 계층별 구분을 강화하고 그 선을 넘으려 드는 유동적 물질은 ‘냄새’가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지상, 반지하, 그리고 지하에 살고 있는 박사장, 기택, 문광 가족의 삶의 현실과 욕망, 그리고 좌절을 이 영화가 ‘창문’이라는 이차 프레임을 통해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기택의 집 - 반지하의 창문이 비추는 삶의 모습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기택 집의 창문을 경계로, 집 안쪽에는 작은 건조대에 매달린 양말이 보이고, 창문 밖으로는 창문과 평행한 위치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차가 보인다. 이 좁은 창문을 비추던 카메라는 앵글을 아래로 내려 기우를 비춘다. 기택 가족의 집은 ‘반지하’의 공간이다.  

소독 약품을 뿌리는 소리와 함께, 창밖은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찬다. 기정은 ‘빨리 창문 닫아.’라 말하지만, 기택은 집안 소독을 한다며 창문을 닫지 않는다. 그리고 소독 연기는 집안을 가득 메운다. 소독 연기와 같이 물성이 희미한 것들에게 조차 아무런 저항 없이 침식당하는 공간이 기택의 반지하 집 인 것이다.  

가족들끼리 단란한 맥주파티를 하며, 카메라는 집 안쪽에서 창문을 통해 보는 바깥 풍경을 비춘다. 창문의 창살들 사이로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기택 집의 창문 앞에서 배뇨를 하려고 한다. 이 반지하의 공간은 창문 바깥에서는 무시되는, 창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공간이다. 그러나 기택의 가족들은 마치 영화라도 보는 듯 다 함께 창 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박사장의 집/회사 – 지상의 창문과 구분 짓기 

 기우는 계속해서 계단을 오른다. 반지하 집에서 올라와, 경사 높은 언덕을 거쳐, 자동으로 열리는 문을 통과한 뒤 박사장의 집 안에 이르는 계단까지. 기우가 과외를 하러 간 박사장의 집은 기택 가족의 집과는 달리 조용하고, 넓고, 해가 잘 든다. 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기우는 수많은 문을 넘는다. 대문과 정원, 여러 개의 중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박사장의 집은 소독 연기가 온 집안을 메우던 기택의 집과는 높이 뿐만 아니라 그 중첩된 깊이에서도 상반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안쪽 가장 깊은 공간인 집 내부 정원(중정)에서는 연교가 낮잠을 자고 있다. 유리창 두개가 이어지는 선은 교묘하게 가정부인 문광과 연교 사이를 지나며 둘 사이의 계급을 구분 짓는다. 이 창밖을 비추는 카메라는 기우의 뒤통수 뒤에 위치하여, 유리창이 만들어낸 선을 기준으로 기우를 문광 쪽에 위치하게 한다. 선을 통해 문광과 기우, 그리고 연교의 계급을 구분 짓는 것이다. 

 

 기택이 찾아간 박사장의 회사 유리창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도가 나타난다. 유리창 두개가 맞닿는 면을 경계로, 박사장과 기택이 이 분할된 화면의 각각에 위치하게 된다. 이 유리창은 투명하여 양쪽을 모두 볼 수 있지만, 분리된 공간이다. 이는 계급으로 구분 지어져 선을 넘을 수는 없는 기택과 박사장 가족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듯 하다.  

 직후 이어지는 시퀀스는 충숙이 박사장의 집에 입성하기 위해 문광을 내쫓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몽타주이다. 박진감 넘치는 배경음악과 함께 기택 가족은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 문광을 결핵으로 위장 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노래가 끝나고, 대사 없이 연교가 정원에서 문광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듯한 장면 다송이의 시각에서 창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듯, 소리는 넘어가지 못하는 유리창이지만, 일렁이는 빛은 넘어와서 넓은 유리창을 통해 다송이에게 닿는다. 넓은 창을 통해 박사장의 집 안에 들어오는 것은 소리도, 연기도, 냄새도 아닌 따뜻한 햇빛 뿐이었다. 기택 가족의 냄새가 그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말이다. 다송이는 킁킁대며 기택과 충숙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는 ‘제시카 쌤한테도 같은 냄새가 나는데.’ 라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깨끗하게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반지하’ 냄새는 유리 없는 창문처럼 기택 가족에게 스며들어, 박사장네 가족과의 구분을 더욱 강화한다.  

 

■ 다시 기택의 집, 물바다의 복선

 박사장의 집에 모두 입성한 네 명의 가족은 반지하의 집에서 맥주파티를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집창 문 앞에 노상방뇨를 하는 한 취객에게 화가 난 기우는 물을 뿌린다. 이 장면을 기정은 완전 물바다야.라고 웃으며 말하고, 휴대폰으로 이 창문 밖 모습을 찍는다. 카메라는 슬로우 모션으로 이 휴대폰 속 화면을 비춘다. 영화 속 휴대폰 화면이라는 프레임 안에 또다시 창문이 겹쳐지며 중첩적인 프레임을 보여준다. 창문 밖 물바다의 모습은 성스러운 배경음악, 노란 빛의 가로등 조명, 슬로우 모션, 웃음소리와 겹쳐지며 관객들에게 이 상황이 마치 행복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반지하의 창문이 비추는 완전 물바다는 극 후반 발생할 진짜 물바다 암시하는 복선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 다시 박사장의 집, 같은 구도와 다른 욕망

 창 밖의 다송이와 창 안쪽의 박사장은 ‘무전기’를 통해 소통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소리에도 냄새에도 (이후에는 물에도) 사정없이 침식당하는 기택의 반지하 창문과는 달리 박사장 집의 유리창은 투명하지만, 날씨에도, 외부의 소리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저 그림같은 풍경과 여유로움을 담는, 액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즐겁게 무전기를 통해 소통하는 다송이와 박사장의 구도는 박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난 후 기우와 기택의 구도로 대치(代置)된다. 그리고는 창 밖이지만, 집 안에 있는 마당 위의 기우는 ‘이게 집에 누워서 하늘 보고 있는 거거든. 되게 좋아.’라고 말하며 반지하 집 창밖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을 더욱 강조한다.  

 저녁이 되자, 기택 가족은 박사장 네 집 거실에서 위스키 파티를 벌인다. 앞서 ‘물바다’가 나오던 장면과 유사한 구도이다. 공간이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변화하며, 창문의 위치와 크기도 바뀌었고, 이에 따라 창문을 조명하던 카메라의 시선도 로우 앵글에서 아이레벨로 움직인다.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이던 가로등의 불빛과 사람들의 모습, 들리던 차소리와 취객의 술주정은 아주 조용한 빗소리로 바뀌었다. 네 가족이 반지하 집에서 함께 창밖을 바라보던 것과 같은 구도로 앉아있지만, 맥주는 위스키로 바뀌었고 그들의 대화 주제는 점점 더 높은 욕망을 향해간다.  

 

■ 하강하는 비와 공간 - 창문의 기능

 갑작스레 돌아온 박사장 가족 몰래 가까스로 빠져나온 기택 가족은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간다. 내려가는 계단은 사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이어져 있다. 비를 맞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기택 가족을 카메라는 롱쇼트로 담으며, 관객과의 거리를 확보한다. 피사체와 거리를 두며 확보된 객관적인 시각은 기택 가족의 비극성을 한층 심화한다. 

 집 앞에 다다른 기택은 창문이 열려 있는 집을 발견한다. 그리고 반지하 집 가득 물이 가득 찬다. 진짜 ‘물바다’가 난 것이다. 그날 밤 내리던 비는, 지상의 궁궐 같은 집에 사는 박사장 가족에게는 그저 ‘덕분에 캠핑에서 돌아오게 한’ ‘미세먼지 없는’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창문 밖에서 혼자 캠핑을 즐기는 다송이의 장난감 텐트는 비에 젖지 않는다. 하지만,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택 가족은 창문으로 끊임없이 쏟아 내리는 비 때문에 집을 잃었고 ‘냄새’가 강화되었다. 일상적인 외부의 자극인 비를 통해, 창문의 기능을 달리 보여줌으로써 계급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창문 없는 지하실

 이 영화에 나오는 세 가족 중 유일하게 창문이 없는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은 문광의 남편인 근세 뿐이다. 그가 살고 있던 지하실에는 창문조차 없으며, 그가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좁고 높은 계단을 지나야 나오는 문 뿐이다. 기택과 기택의 가족은 반지하의 창문으로 궁핍한 현실을 바라보기도 하고, 박사장의 집에서 창 밖의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풍요로운 삶에 대한 꿈울 꾸기도 한다. 하지만, 근세의 거처로 표현되는 지하실은 빛 한줌 들어오지 않은, 바깥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다송이만 알아주는, 모스부호로 깜박이는 전등 뿐이다.  

 

마무리하며 

 영화 <기생충>을 극장에서 처음 감상했던 순간에는 영화에 나타난 ‘공간’의 깊이감이 인상적이었다. 지상과 지하, 그리고 반지하로 대표되는 각 가족단위, 수석이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기생충’의 의미와 영화가 계속해서 던져주는 ‘계획’과 ‘상징적’이라는 단어까지. 영화를 감상하면서 끝도 없이 나오는 미장센과 은유들에 정신없이 빠져들며 감상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를 다시 보니, 그 은유들 사이에 있는 ‘유리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밖의 서로 다른 풍경들, 창문이 만들어낸 선으로 또 다시 구분 지어지는 계급, 욕망의 시선으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지만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단절, 그리고 아주 작은 창문 조차 없는 곳까지, 영화가 조명하는 공간에는 다양한 창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수업 과제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 글을 쓰며, 문학을 창문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학교 근처 반지하 자취방에 살던 1학년의 내가 창밖으로 보던 풍경과 글을 쓰던 당시 자취방의 창밖에 보이던 풍경이 달랐던 것이 마치 문학이 조명하는 서로 다른 세상의 모습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 뿐만 아니라 불을 끄면 보이는, 창에 비친 나의 모습이 문학이 하는 기능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창문과 문학은 나를 둘러싼,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해주고, 이와 동시에 창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이 영화는 창문을 다양한 장면에서 이차 프레임으로 사용한다. 그와 동시에 영화 자체로도 창문의 기능을 하고 있다. 영화 <기생충>을 보는 관객들은 영화라는 창문을 통해 영화가 다양한 기법으로 연출해낸 세상을 바라보며, 이와 동시에 그 영화에 비친 자기 자신 또한 바라보게 된다. 나는 어떤 계급일지, 영화 속의 인물들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일지,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생각에는 영화라는 창문에 비추어진 내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문학과 영화의 기능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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